[Villains Series #04] Strife : One Truth Once More
다시 생각하면 너무나도 매정하지 않나 싶다. 하드코어 밴드를 넘어서 한 시대의 헤비니스 아이콘으로 대접하고 있는 Hatebreed 와 Terror, 그러한 밴드들의 탄생을 있겠끔 한 선배 하드코어 밴드들인 Cro-Mags, Sick Of It All, Madball 에 대한 강한 존경, 이런저런 인디 하드코어 레이블에서 등장하고 있는 괜찮은 신예들의 선전과 그에 대한 다양한 언더그라운드씬의 호응, 그리고 이런것들이 한줌의 아쉬움 없이 실행되고 있는 2000년대의 메탈-하드코어에 대한 리스너와 음악 언론의 지속적인 관심, 그리고 두 세력의 활발한 피드백으로 인해 만들어진 탄탄한 문화 베이스에 비해 본다면, 90년대 하드코어 아이콘인 동시에 하드코어 카데고리를 넘어서 90년대 헤비니스 아이콘으로도 평가 할 수 있는 Strife 에 대한 관심과 존경이 너무나도 적은건 “매정” 이라는 단어를 써야만 옳지 않느냐는 말이다. Strife 가 그저 “현재 존재하지 않는 밴드”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역사에 저편에 파뭍힌채 언급되지 않는다? 절대 옳지가 않은 부분이다. 왜냐면 그들은 90년대 하드코어를 논하는데 있어서 절대 빠트릴 수 없는 밴드이자,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맨 처음으로 거론 되어야 하는 밴드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도 늦었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서야 하다니… 하지만 딱 좋은 타이밍이다. 그들이 11년만에 새 앨범 Witness A Rebirth 을 발표하며 돌아왔기 때문이다. 역시 썰을 풀기에 타이밍 만한게 없지 않던가? 시작하자.
Strife 는 하드코어 사운드의 변화상에 있어서 중요한 터닝포인트를 기록한 밴드라는 점을 먼저 거론하고 싶다. 그들이 남긴 사운드적 업적을 간략히 정리 하자면 “하드코어에 헤비함을 끌어 당기는 가운데, 하드코어의 카데고리를 넘어선 유니크한 헤비니스 사운드로 90년대의 컬트적 존재로 기록 되었음” 이 되겠다. 지금이야 하드코어에 헤비함이 존재하는것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하드코어에 헤비함이 도입 된 것은 뉴욕 하드코어의 본격적 성장과 함께 한 것이었고, 뉴욕 하드코어의 성장은 LA, 보스턴, 워싱턴 하드코어씬의 쇠락과 가사상태 돌입후 에서야 빠른 성장을 하게 된다. 뉴욕씬의 진정한 시작인 타 지역씬 보다 시기적으로 꽤 늦은 성장이었다. 그때까지 하드코어는 짦고 빠르고 날카로운 스타일이었고, 80년대 중반부터 시작 된 뉴욕 하드코어 스타일로 인해 메탈적인 헤비함을 갖추기 시작했다. 하드코어 하면 생각나는 브레이크다운, 빗다운, 헤비그루브, 모쉬파트 등등등… 다 하나 둘 씩 탑재하며 헤비 해 지기 시작한 것이다.
Strife 는 바로 그러한 헤비 사운드로의 발전에 한 축을 자랑하는 밴드이다.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점은 그러한 헤비 사운드의 추구는 뉴욕을 거점으로 한 미국 동북부 지역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Strife 는 그와 정반대의 극에 위치한 캘리포니아 LA 에서 등장했다. (이는 조금 뻥을 보태서, 요즘 많이 자리매김을 한 서부 하드코어/메탈코어의 진정한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진정 놀라야 할 점은 출신지의 의아함이 아닌, 좀 더 앞서 나간 혁신적인 하드코어 사운드였다. 그러한 뭔가 다른 면모는 결론적으로는 이래저래 부족 하지만, 분명 많이 새로운 하드코어이자 헤비니스였던 데뷔작 One Truth (1994) 부터 나타났다. 헤비 그루브를 탑재한 하드코어 사운드였지만, 내면적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는듯한 감정적 소용돌이가 휘감긴 엑스페리멘탈릭한 분위기의 존재는 분명 새로운 것이자 이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적 코드가 탑재 된 듯한 느낌과 이어지며 조화를 이루는 이들만의 메시지는 매우 놀랄만한 것이었다. Strife 는 스트레이트 엣지 (Straight Edge) 밴드였으며, 그들의 표현 방식은 그저 “진실 된 삶을 찾아 봅시다” 정도의 구호발산이라는 올드스쿨적 표현과는 다른, 자아성찰적인 코드의 감정적 표현방식의 직접적 도입, 그에 걸맞는 다소 복잡한 은유적 표현,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한 스트레이트 엣지적 어레인지, 그러한 복잡한 메시지에 어울리는 복잡한 필의 그들만의 헤비니스 코드는 발표와 동시에 상당한 관심을 얻었으며, 화끈한 매력이 넘치는 라이브 활동을 통해 하드코어씬의 빅띵이자, LA 지역의 헤비니스 초신성으로 성장하게 된다. 밴드는 음악과 사상을 알리는데 있어서 거침 없었다. 단 한장의 정규작을 발표한 입장이지만, 밴드는 자신들의 음악과 사상을 활동을 집중조명하는 라이브/다큐멘터리 영상물 One Truth Live Winter ’95 (1996) 을 발표하며 더욱 더 자신들만의 음악과 사상을 전파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고, 새로운 스트레이트 엣지 성향의 하드코어 키즈들을 서서히 증식 시키기 시작한다.
데뷔작을 통해 스포트라이트를 충분히 얻은 Strife 는 두번째 앨범인 In This Defiance (1997) 을 발표하며 레전드 반열에 올라선다. 데뷔작 “사운드적/사상적으로 발전 된 하드코어” 를 들려 주었다면, 두번째 앨범인 In This Defiance 는 “하드코어를 넘어선 위대한 90 헤비니스 컬트 클래식” 으로의 영광을 달성하는데 성공한 앨범이다. 데뷔작에서의 발전 된 메탈릭 하드코어를 그대로 이어가며, 하드코어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쓰래쉬/익스트림 메탈, 그루브 메탈, 얼터너티브 메탈, 모던 헤비니스의 영역까지 시도하고 자신들만의 사운드로 귀결 시키는데 성공한 In This Defiance 는 그렇게 전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드코어가 얼마나 헤비해 질 수 있는가에 대한 극단화, 다양한 헤비니스 장르의 파격적인 도입/자기화, 이를 통한 하드코어라는 음악 특유의 음악성 한계 돌파, 그로인한 컬트적 헤비니스 아이덴티티의 확보를 해 냈고, 데뷔작에서 보여 주었던 그들만의 스트레이트 엣지 메시지 구현방식인 더욱 더 탄탄해졌다. 이들은 전설이 아니 될 수 없었다. 특히 하드코어 카데고리 바깥의 헤비니스씬의 주목도는 매우 대단했다. 이는 In This Defiance 의 제작단계에서 이미 드러난 사실이었는데, 이 앨범에 게스트로 Sepultura 의 드러머 Igor Cavalera, Deftones 의 보컬리스트 Chino Moreno, Fear Factory 의 기타리스트 Dino Cazares 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Strife 는 하드코어씬에서 자신들의 하드코어 사상을 전파하는데 부지런 했던 밴드로 매우 유명했지만, 그 당시 새로운 헤비니스를 추구하던 밴드들과의 공연을 통한 교류 역시 소홀치 않았던 밴드로도 꽤나 이름을 날렸었었다. 그렇게 밴드는 하드코어씬과 헤비니스씬에서 완벽한 인정과 성공을 해 나가기 시작한다.
In This Defiance 가 다양한 부류로부터 큰 호평과 인정을 받으며 성장하기 시작했지만, 밴드는 놀랍게도 그 시점에서 매우 급격하게 흔들리고 추락하고야 만다. 밴드는 내외적으로 문제가 하나둘씩 발생하며 파멸로 치닫기 시작했다.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은 Minor Threat 의 해산을 통해 80년대 말부터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Strife 와 같은 여럿 밴드들의 깊이 있고도 혁신적인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의 제창은 90년대에도 다시 스트레이트 엣지 열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약물/알코올/무분별한 섹스에 대한 반대와 그러한 쾌락적인 것을 멀리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는데 매진하라는 스트레이트 엣지의 부활은 좋은 결론을 낳으리라 여겨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 쪽으로 많이 흘러가고야 만다. 80년대 하드코어판이 그랬듯이 공연장내 폭력은 여전했고, 심오해진 사상 덕분에 더더욱 강경 해 지고 엄격해진 스트레이트 엣지 커뮤니티 내 분위기,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 민간인과의 폭력적 마찰 (주로 스트레이트 엣지들과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에 반대되는 알코올/약물 중독자/동물 학대자 민간인과의 마찰이었다.) 은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한 가운데 언론들은 연신 이러한 하드코어 크루에 대한 폭력적 리포트를 쉴 새 없이 하게 되고, 파이오니어라 할 수 있는 밴드들은 직접 TV 출연 하거나, 인터뷰를 통해 원래 해명 릴레이를 이어가게 된다. (특히 최전선의 밴드인 Earth Crisis 의 리더 Karl Buechner 의 CNN 출연과 인터뷰/대담은 매우 유명했다.) Strife 역시 이러한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자유롭지 못했으며, 사상적인 충돌이 당연히 이어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밴드의 각 멤버들간의 음악적 이견까지도 발생하기에 이르른다. 결국 밴드는 1999년에 활동중단을 선언한다.
그리고 밴드는 지금까지의 폭발적 활동이 무색 할 정도로 철저하게 외면 당하게 된다. 두장의 앨범에서 얻은 사상적, 음악적 호평이 무색 할 정도로 말이다. 밴드는 2001년에 컴백을 알리고 세번째 풀렝스 앨범 Angermeans 를 발표한다. 더욱 강해진 엑스페리멘탈함과 프록적 영역까지 나아갔다고 할 수 있는 진보적 메탈-하드코어 믹스쳐의 대단함, 더욱 더 강한 카리스마의 내면성찰적 가사와 사운드와의 완벽 조화를 이룬, 밴드가 또 한번 진화 했음을 알린 대단한 작품이었지만, 이 앨범은 제작 전부터 “더 이상 스트레이트 엣지적인 내용은 없다” 라고 공표한 앨범이었고, 정말 놀라울 정도로 스트레이트 엣지 커뮤니티로부터 (일종의 배신자 취급을 받으며) 외면을 당하게 된다. 여기에 이 앨범이 보컬리스트이자 밴드의 사상을 책임졌던, 그리고 스트레이트 엣지 사상을 버린 초강수를 띄운 주인공 Rick Rodney 와 세션 드러머 단 두명이서 만들어 진 앨범이라는 사실로 유추 할 수 있는 밴드 생명의 끝장남 의미, 음악적 평가 보다는 왜 스트레이트 엣지를 버렸는지에 대한 펑크/하드코어 언론의 과도한 흥미위주의 접근 덕택에 이들의 이미지 몰락의 결정타가 되고야 만다.
그렇게 밴드는 11년을 보낸다. 밴드는 해산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 세월동안 존재 여부를 알리는 공연과 투어를 종종 하기도 했지만 11년동안 Strife 는 빈사상태였다. 밴드는 11년의 세월동안 Angermeans 시절 받았던 “왜 스트레이트 엣지를 버렸었나?” 에 대한 질문에 대해 쉴 새 없이 답변했다. 자신들의 선택이 배신이 아닌 자연스럽고 정당한 결정임을 11년동안 계속 증명 해 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밴드는 11년 동안 새 앨범을 제작 할 것이라는 코멘트를 반복했다. 그러한 코멘트가 반복되고, 시간이 점점 흐르자 신보 제작 이야기는 그저 그런 코멘트로 남게 된다. 하지만 2012년이 되자 분위기는 급반전 된다. 11년의 시간동안 멤버 교체 없이, 무너진 서로간의 신뢰를 다잡으며 밴드에 100% 몰입을 해 낸 상태에서 탄생 된 곡들이 앨범을 만들만큼 충분히 모였기 때문이다. “곧 앨범을 낼 것이다” 라는 막연한 코멘트는 2012년 초에 들어와 “녹음하러 브라질로 떠날 것이다” 라는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었으며, 이들의 마스터피스 In This Defiance 에 피쳐링 했던 Igor Cavalera 의 또 한번의 우정출연 확정, 그 앨범에 뒤쳐지지 않는 화려한 피쳐링 확보 (Soulfly 의 엑스맨 Mark Rizzo, Biohazard 의 보컬/기타리스트 Billy Graziadei, Terror 의 보컬 Scott Vogel, 프로듀서로 Terror 의 드러머이자 프로듀스업도 하고 있는 Nick Jett 기용) 하는게 성공 했으며, 일정 간격으로 올린 앨범 제작과정 비디오 블로깅, 하드코어의 본질 추구와 사운드적 혁신 모두를 추구하는 범상찮은 행보의 인디 하드코어 레이블 6131 Records 와의 계약, 커버 아트웍/발매일자의 발표까지 경이롭게 빠르게 구체화 되기에 이르른다.
2012년 11월 6일, 진정한 전설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동안 너무나도 힘들었던 11년을 청산하러 돌아온다. “과연 성공할 것인가?” 이러한 코멘트는 하고 싶지는 않다. 해서는 안된다. 11년의 세월동안 너무나도 무시당한 세장의 위대한 음악적 & 사상적 발자취를 확인 해 본 사람으로써 이러한 말을 남기기고 싶다. 이래저래 이바닥 저바닥 “전설” 이 많고, “전설이 돌아온다” 라는 코멘트도 많이 쓰이지만, 이번은 좀 다르다. 헤비한 하드코어 역사에 있어서 1-2위를 다투고도 남는 신적인 존재가 돌아오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들의 원 트루쓰를 기대하며, 다시 한번 이들이 90년대에 얻었던 영광을, 너무나도 잊혀진 그 영광을 다시금 회복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잘 할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밴드니까.
- Mike Vill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