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llainsSeries #25] Lemmy, 그는 누구인가?

[VillainsSeries #25] Lemmy, 그는 누구인가?

lemmy

Lemmy Kilmister
레미 킬미스터
본명 Ian Fraser Kilmister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Motörhead 의 베이시스트이자 보컬, 그리고 그 자체인 인물.
20세의 나이로 음악계에 입문, 운명을 달리 할 때까지 현역 이었으며 락스타 그 자체였던 남자.
락스타라는 위치에 놓여져 있었기에 터프하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남자.
그와 동시에 락스타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와는 정말 거리가 멀었던 훈남이자 신사였던 사나이.

한 평생을 화끈하게 살다간, 그리고 그러한 화려함 만으로만 절대 평가 해서는 안되는 속이 꽉 찬 진짜배기 형님이었던 그분을 기일을 맞이하여 한번 조명 해 보았습니다.

- Lemmy 의 어린 시절은 누가봐도 꽤나 거칠었다. 잉글랜드 중부 지역 스토크온트렌트에서 출생, 10살 되던해에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해 웨일즈로 이사, 어려서부터 슬롯 머신과 락앤롤에 빠져드는 등 테크트리가 꽤 좋지 않았었다. (그는 이러한 유년 생활 속에서 본명은 아니지만, 평생동안 그를 지칭하는 이름인 Lemmy 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이 Lemmy 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어쩌다보니 Lemmy 가 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다행이도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빠져 들었던건 락앤롤 이었다. 그는 학교에 기타를 가져 온 녀석이 여학생 들에게 둘러 쌓여져 있는것을 보고 밴드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 Lemmy 로 하여금 락앤롤 뮤지션이 되어야 겠다고 느끼게 만들어 준 것은 조금 아이러니컬 하게도 The Beatles 였다. 그가 The Beatles 의 광팬인것은 매우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그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Rickenbacker 베이스만을 사용하는 것 역시 Paul McCartney 의 큰 영향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가? Motörhead 가 “얌전떠는 음악에 대한 극단적 반감을 보이던 거친 녀석들의 애호 넘버원 음악” 이라는 타이틀을 지니고 있으며, 그 주체가 Lemmy 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고전 락앤롤과 그 시대의 팝 음악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 표출은 매우 강하다. Motörhead 의 이름으로 고전 락앤롤을 여럿차례 커버 했다던지, The Head Cat 와 같은 로커빌리 프로젝트를 했다던지 하는 등의 것들로 충분히 그 애정들이 충분히 증명이 된 상태이기도. 더불어서 그와 친하게 지내던 뮤지션이 “ABBA 한번 커버 하는건 어때?” 라고 농담을 던졌더니 Lemmy 가 “좋은곡 많은데 어떤곡으로 할까?” 라며 매우 진지하게 임했다는 일화도 있다고. 그렇다. 그는 매우 다이하드한 음악을 하지만, 생각보다 음악적으로 매우 오픈마인드인 사람이었다. 허나 최근 음악은 좋아하지 않는듯. 그의 예상외의 넒은 음악적 취향 때문에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요즘 음악중에는 뭐가 좋나요 라는 질문에 대해 “요즘 음악은 안들어. 난 언제나 5-60년대의 고전 락앤롤과 팝 음악을 듣지. 그게 진짜야.” 라는 답변을 한결같이 보여 준 바 있기에 그러하다.

- The Beatles 의 광팬이어서 그러한가? 그의 첫 커리어는 The Beatles 의 음악적 스타일과 비주얼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밴드 The Rockin’ Vickers 에서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60년대 영국식 기타팝/락앤롤을 구사하는 밴드였고, Lemmy 는 밴드 말기에 기타리스트로 활약 한 바 있다. 지금의 강렬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딱 The Beatles 스타일” 을 한 그의 The Rockin’ Vickers 시절의 모습을 본다면 꽤나들 놀라실 듯?. 그때가 그의 나이는 20세. The Rockin’ Vickers 는 Lemmy 가 재적하던 시기에 The Kinks 의 곡을 커버한 곡 Dandy 를 살짝 힛트 시키기도 했지만, 머지않아 밴드는 1967년에 해산을 결정하게 되고 Lemmy 는 잠깐이나마 무직자가 된다.

- The Rockin’ Vickers 의 해산 후 Lemmy 는 런던으로 이주한다. 그는 무려 Jimi Hendrix Experience 의 베이시스트인 Noel Redding 과 룸 쉐어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Jimi Hendrix Experience 밴드의 로디로 업계일을 시작하게 된다. Lemmy 는 매일 Jimi 의 죽여주는 공연은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음악의 원천인 애시드 계열의 약물 또한 매일 경험하게 된다. 이는 Lemmy 의 아이덴티티 중 하나인 “약물광” 이미지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때가 1970년의 일이었다.

- Lemmy 는 1971년에 Hawkwind 에 가입한다. Hawkwind 는 사이키델릭/스페이스락 밴드였지만, 그 당시 타 밴드들과는 달랐다. 예술적 음악 창출과는 거리가 먼, 거칠고 다이내믹한 사운드를 펼쳤고 점차 예술 놀음으로 변질되던 락앤롤 문화에 대해 반감을 가지던 하위 문화 계급들에게서 큰 호응을 얻었다. Lemmy 는 밴드의 원년 멤버는 아니었지만, 밴드에서 보컬과 베이스를 담당하는 한편으로 밴드의 첫 빅 힛트곡인 Silver Machine 의 핵심으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는 Motörhead 스타일의 청사진도 바로 이 밴드에서 나왔다.

- 하지만 Lemmy 는 Hawkwind 에서 오래가지 못했다. Lemmy 는 스피드와 같은 메스암페타민/필로폰과 같은 화학적 약물을 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버섯 종류의 오가닉 마약을 했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본 Lemmy 는 “점잖들 떠는 재수없는 녀석들” 이라며 업신 여겼다고 한다. Lemmy 또한 매일 스피드에 절어서 난동을 부리거나 떡이 된 채로 인사불성이 되는 등 음악/투어 활동에 지장을 계속 초래하여 나머지 멤버들이 영 탐탁치 않아 하던 상황 이기도 했다. 이 두 세력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결국 1975년에 터지게 된다. 투어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Lemmy 는 암페타민 소지로 인해 구금되는데, 그 과정에서 Hawkwind 측은 무려 그를 그 자리에서 버리고 가버렸다.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 투어를 계속 하려던 Lemmy 는 투어 일정의 길 한복판에서 자신이 해고 당했음을 알고 너무나도 어이 없어 했다고. Lemmy 는 무려 히치하이킹을 이용해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씁쓸한 결말은 놀랍게도 Motörhead 및 Lemmy 의 진정한 신화의 시발점이 된다.

- 영국에 돌아 온 Lemmy 는 자신이 리드하는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것도 무려 “세계에서 가장 더럽고 시끄럽고 비열한 코드의 밴드” 를 목표로 말이다. Lemmy 는 그렇게 자신의 밴드 Bastard 를 1975년에 결성한다. Hawkwind 에서 냉정하게 해고 된 그 해와 똑같은 해에 말이다. 허나 밴드명으로 Bastard 라는 비속어를 사용하기엔 70년대 시대상은 너무나도 엄격했고, 결국 Lemmy 는 Hawkwind 의 곡에서 따 온 이름인 Motörhead 로 이름을 개명 하고야 만다. 그리고 다들 아는 전설이 시작된다.

- 1977년에 셀프타이틀 데뷔작, 1979년에 2집 Overkill 과 3집 Bomber 로 준비운동을 마친 Motörhead 는 1980년에 세기의 대명작 Ace Of Spades 를 발표하며 락 음악씬에 적잖은 충격을 전해주며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한다. Motörhead 는 모든것이 공격적이고 새로운 밴드였다. 긴 러닝타임의 예술적 코드로만 나날히 커져만 가던 그 당시의 락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짦고, 빠르고, 공격적이며, 시끄러웠다. 모터사이클 갱, 서부영화의 악당 등 거친 사나이의 아이덴티티를 극대화하는 비주얼과 가사 센스 발휘는 매우 강렬했다. Motörhead 는 락앤롤, 블루스, 하드락에서 헤비메탈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헤비하고 커다란 사운드 메이킹, 심플하고 스피디한 질주 감각, 남성미와 악당 캐릭터적 매력이 넘치는 캐릭터 구축 등은 누가 뭐래도 “모든 종류의 공격적/익스트림 메탈의 시작” 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걸 누가 만들었다? 바로 Lemmy 였다.

- Lemmy 는 구사하는 음악과 똑같은 삶을 살며 많은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 시켰다. Motörhead 의 가사안에 들어있는 음주, 도박, 배신, 야비함, 모터사이클 라이프 등 수많은 매력적 악당 코드들은 Lemmy 라는 실존 인물 그 자체의 삶이기도 했다. Lemmy 는 술, 마약, 여자에 대해 절대로 절제하지 않았고, 그에 합당하게 걸걸한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멋지게 포장했다. 그는 과거보다 더 거친 락 음악을 구사하길 원하고, 과거보다 더 거친 개성을 지닌 자기 자신을 갈고 닦고자 하는 어린 녀석들의 우상이자 선생님이 되었다. 음악적으로나 애티투드를 지닌 한 사람 강렬한 존재로써나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스피드 메탈 밴드들과, 수많은 펑크/하드코어 밴드들이 탄생 되었음을 찾는건 일도 아니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자.

- Lemmy 는 Motörhead 와 동일한 삶의 아이덴티티를 추구 했지만, 락스타 특유의 허례허식과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다. 거친 사운드와 애티투드로 충만했고, 그로 인해 인기 밴드가 되었지만 그는 사석에서 언제나 처럼의 소탈함과 겸손함을 보인 바 있다. 부와 명예를 거머 쥐었어도 언제나처럼 보통의 바에서 싸구려 위스키 잭 다니엘스를 마시고, 사진과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 모두에게 하나 같이 친절하게 대해 주고 (1984년부터 Lemmy 의 운명 때까지 밴드에서 활약한 기타리스트인 Phil Campbell 은 “내가 꼬맹이 시절 Hawkwind 의 사인을 받으려 호텔에 근처에서 서성 거리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와서 사인을 일일히 다 해 주던건 Lemmy 뿐이었지. 내가 그와 밴드를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 라고 말한건 유명한 일화다.), 자신을 롤모델로 삼은 후배 뮤지션들 앞에서 거들먹 거리지 않고 술 담배 마약을 아끼지 않고 나눠주고 농담을 건네는 등의 행동을 통해 동네 나쁜형(?) 으로써의 매력을 표출하며 “진정한 락앤롤 사나이” 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 준 바 있다. 그래서인가? Motörhead 의 음악을 좋아 할 법한 거친 세계의 거친 여자들은 Lemmy 에게 유난히도 달라 붙었었다. (Lemmy 또한 오는 여자 막지 않았다.) Lemmy 가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도 젊은 여자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을 엄청나게 보여 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락스타적 거들먹 거림과는 거리가 먼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움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Lemmy 는 원래 저래” 하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나 싶다.

- Lemmy 는 한평생 술 담배 마약 여자 등 쾌락적 삶에 대해 전혀 절제하지 않았다. 그가 나이를 먹고나서 고혈압과 당뇨병 판정을 받게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악화 된 건강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난 신을 찾기엔 너무 늦었어. 그냥 살던대로 살다가 가는거지.” 라고 답하여 70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 할 때까지 꾸준히(?) 인생을 즐겼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과하되, 자신의 음악 커리어와 건강이 망가질 정도로는 절대 하지 않았던 나름 절제감을 보여 주기도 했다. (더불어서 절대로 헤로인, 코카인과 같은 극단적 중독성의 마약을 절대로 하지 않았기도 했다. 그것들을 한 동년배 친구들이 하나같이 빠르게 운명을 달리 한 것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나 뭐라나…) 인생을 한껏 즐기면서 70세까지 살 수 있던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이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어린 팬들이 똑같이 따라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언제나 처럼 비춰왔다. 자신이 봐도 그건 아니다 싶었나 보다.

- 구사하는 음악과 라이프 스타일의 동일성으로 인해 독특한 색채의 언더그라운드 컬트 락스타 취급을 받고 있는 Lemmy 인데, 그러한 강렬한 컬트적 캐릭터 확보에는 그의 매우 뛰어난 가사 제조 센스가 큰 도움을 주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Lemmy 와 Motörhead 가 유난히도 독특한 존재로 취급받고, 수많은 추종자를 낳는것은 파워풀한 음악과 거친 라이프 스타일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듯한 비열하지만 매력적인, 남자라면 누구나 되고 싶어하는 멋진 악당상을 술 도박 여자 싸움 등의 소재를 이용해 멋지게 피력 했으며, 그렇게 만든 자신만의 강렬한 아이덴티티를 중심으로 청자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전해주며 쐐기를 박아왔다. 넌 강해, 거칠고, 무서워 하는게 없으며, 할 말 다하고, 하고 픈 거 다하고, 누군가를 엿 먹일 수 있고, 언제나 쳐 맞고 핍박 받고 그래도 결국 니가 승리하고 그런단 말이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한 소절을 더 붙였다. “그렇지 않아?”, “넌 그런 놈이지?”, “자 이제 어떡해야 할까?” 라는 식으로 말이다. 락 음악의 유행 코드와 상관없이 Motörhead 의 추종자가 유달리 많으며 팬들과 밴드, 팬들과 팬들 사이의 유대감이 남다르게 강한 이유는 바로 Lemmy 가 써 내려가는 가사의 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 가사 센스가 정말로 남달라서 인가? Ozzy Osbourne 은 이례적으로 Lemmy 에게 가사 하나 써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탄생 된 곡이 Mama, I’m Coming Home 이다. Ozzy 의 1991년작이자 은퇴를 미리 공표하고 만들었기에 자신의 험난한 인생사가 투영 되기도 했던 앨범 No More Tears 의 수록곡이었던 그 곡은 Ozzy 가 “어떻게 Lemmy 가 나의 인생 전체와 현재의 심정을 꿰고 있는지를 모르겠다. 정말 대단한 가사였다.” 라고 극찬을 한 바 있었다. Lemmy 는 이 곡 하나의 가사를 써 주면서 매우 두둑한 금전을 받았다고. “내가 그때까지 Motörhead 해서 번 돈 보다도 많이 받았어!” 라고 인터뷰에서 직접 밝힐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만한 가치가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 Motörhead 는 락 음악 역사에서 메탈과 펑크, 두 문화를 이상적으로 뒤엉키게 만든 첫번째 밴드다. 밴드의 출세작 Ace Of Spades 는 1980년에 발매 되었고, 그 시기는 록앤롤/하드락이 저물고 펑크와 헤비메탈이 떠오르던 시대였다. 그당시의 고전 록앤롤/하드락은 음악적인 욕심이 너무 과해 노동 계급의 엔터테인먼트임을 망각하고 거대한 형태의 예술로 변화 한 지 오래였고, 펑크와 헤비메탈은 그에 반감을 가지고 “하위 부류의 엔터테인먼트 답게 좀 더 심플하고 거칠게” 를 표방하며 빠르게 성장하던 장르였다. 이념은 비슷 했지만 펑크와 메탈의 문화적 이질감은 너무나도 컸다. 펑크는 고전 락앤롤의 전통을 나름 이어 받은 헤비메탈에 대해 똑같은 잘난척 새끼들이라며 반감을 가졌고, 헤비메탈은 펑크에 대해 가벼운 뮤지션쉽과 연주 테크니컬적 요소에 반감을 가졌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Ace Of Spades 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펑크쪽은 Motörhead 가 가진 비주얼에 대해 “똑같은 락앤롤 잘난척 새끼들” 이라는 평가를 내렸지만, 그들이 구사하는 음악은 펑크가 노리는 바와 똑같이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수많은 펑크 팬들이 이념적으로는 배척 해야 할 Motörhead 에게 빠져 들 수 밖에 없었고, 그렇게 Motörhead 는 펑쓰들의 페이보릿 밴드가 되었다. 더욱 더 거칠고 폭력적인 펑크를 원하고 구사했던 스트릿 펑크, 크러스트 펑크 녀석들조차 자신의 펑크 가죽재킷 등짝에 Motörhead 로고와 캐릭터를 박을 정도면 이야기는 끝이다. (음악적 영향력은 말 할 것도 없다!) 헤비메탈 쪽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 있을까? 없다. Suicidal Tendencies, D.R.I., Cro-Mags, Earth Crisis 이전에 Motörhead 라는 밴드는 그 두 장르의 대통합을 해 낸 바 있다. 펑크와 헤비메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인 1980년에 말이다. 그걸 누가 했다? Lemmy!

- Lemmy 는 하드락/헤비메탈쪽의 대명사와도 같은 인물이지만, 흥미진진하게도 펑크 음악의 광팬이기도 하다. Motörhead 를 결성 할 때 레퍼런스가 된 밴드는 디트로이트 출신의 프로토 펑크 밴드이자 엄청나게 시끄러웠던 밴드 MC5 였으며, 70년대 말 – 80년대 초에 영국과 미국에서 펑크가 대폭발 하자 그 음악에 대해 큰 애정을 표출 한 바 있다. Lemmy 는 영국 펑크 아이콘 The Damned 와 매우 각별한 사이라는 점은 상식 꺼리조차 안된다는 점, Motörhead 의 이름으로 직접 미국 펑크 레전드 Ramones 의 찬양가 R.A.M.O.N.E.S. 를 헌정하고 라이브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꾸준히 연주 해 오고 있다는 점, Sex Pistols 의 대표곡 God Save The Queen 을 커버하여 앨범에 수록하고 이 역시 라이브에서 주요 레퍼토리로 애용하고 있다는 점 등 증거도 많다. Lemmy 는 자신의 취향에 맞으면 각 장르가 지닌 행동강령 따위는 상관치 않는 쿨한 남자다.

- Motörhead 의 거칠고 빠르고 시끄러운 스타일의 음악을 가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헤비메탈의 시조다, 하드코어 펑크의 청사진이다 라고 평가들을 많이 하는데, Lemmy 는 이에 대해 꽤나 회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Lemmy 는 평론가들과 팬들의 이런저런 장르 구분에 대해 “우리 음악에 대해 메탈이라 펑크다 말이 많은데, 우리 음악은 그냥 심플하게 락앤롤이야.” 라는 입장을 언저나 처럼 밝혀왔다. 라이브를 시작 할 때 마다 “우리는 Motörhead 야! 우리는 락앤롤을 연주해!” 라는 멘트를 언제나 처럼 날렸다는 점도 있고 말이다. 이는 The Beatles 팬이고, 고전 팝 음악에 강한 애정을 표현하는 남자다운 발언이 아닌가 싶다.

- Lemmy 는 영국 사람이지만, LA 의 명물이자 거물로도 유명했다. 그는 1990년에 미국 LA 로 이주하여 운명을 달리 할 그때까지 그곳에서 지냈으며, 그렇게 독특한 LA 락 음악씬의 아이콘이 되기도 했다. 첨단 유행의 도시 LA 선셋 스트립이 어찌 변화하건 말건간에 그는 해적 모자 아니면 남부군 모자, 남부군 유니폼 아니면 데님 자켓, 카우보이 부츠 차림이라는 매우 독특하고도 그다운 비주얼과 라이프스타일로 25년간 LA 의 이방인이자 대표 아이콘으로써 멋지게 살아왔다. 강렬한 개성을 지닌 LA 지역의 락큰롤 유명 인사들 또한 그의 고집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에 존경을 표했고 말이다.

- 그가 사는 집 두 블럭 떨어진 레스토랑이자 바인 Rainbow Bar And Grill 은 Lemmy 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장소다. 그는 투어를 하지 않는 오프 시즌이 오면 언제나 그곳에 가서 바 한켠에 자리잡은 터치 스크린 슬롯 머신 기계 앞에 앉아 잭 다니엘스 콜라, 담배를 즐기며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Rainbow Bar And Grill 바 한켠은 Lemmy 의 지정석 이었고, 그는 관광객들이 찾는 도시의 랜드마크와도 같은 위용을 그 자리에서 뽐냈다. 운명을 달리 할 때 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Lemmy 전용 그 자체인 터치 스크린 슬롯머신의 하이 스코어 탑텐 이름 대부분은 당연스럽게도 “LEMMY” 가 기록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 Lemmy 는 “락 음악과 페미니즘” 을 논하는 데 있어서 빠트려서는 절대 안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한 평생동안 많은 여자들과 거리낌 없이 즐기던 그 모습을 보면 페미니즘은 커녕 남성 우월주의가 아니냐 반문 할 지도 모른다. 절대 아니다. Lemmy 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에 등장했던 “여성이 주체가 되는 락 밴드들” 을 물심 양면으로 도왔던 전력이 있다. Girlschool, Wendy O. Williams, Lita Ford 와 같이 콜라보레이션 싱글 기획을 했고, 자신이 직접 나서서 Motörhead 의 투어의 오프닝으로 세워 주기도 했다. 70년대의 분위기는 “여자가 어떻게 락 음악과 같은 강한 음악을 할 줄 안다고…” 하는 차별주의적 눈초리가 매우 강하던 시기였고 클럽 공연조차 잡기 힘든 시대였다. “무대를 세팅하던 스탭이나 공연장 주인조차 우릴 업신 여기거나 리허설 조차 못하게 했었다.” 와 같은 여성 주체 밴드들의 경험담은 구글링만 조금 해 본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 하도록 하자. Lemmy 는 그러한 밴드들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으며, 자신의 밴드 멤버들과 크루들이 그러한 여성 주체 밴드들을 업신 여기는 코멘트를 할 때마다 남자건 여자건 잘하면 장땡이지 왜 무시하고 그러냐는 코멘트를 꼭 날리며 여성 주체 밴드들의 기를 직접적으로 살려주던 인물 이었다고 한다. 업신 여기는 밴드 멤버에게 “너보다 연주 잘해 임마!” 라는 다소 위험한 코멘트까지 날릴 정도였다고.

- Lemmy 는 절대로 라이브 스케쥴을 빼 먹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스케쥴은 팬들과의 약속과도 같은데, 그 약속을 내가 져 버릴 수 있겠냐는 것이 바로 그 이유라고. 밴드의 드러머였던 Micky Dee 가 다리가 골절되는 상황도 있었지만, 깁스를 한 채 냅다 킥 베이스를 밟아대며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그는 2013년에 있었던 Wacken Open Air 에서 가진 Motörhead 의 공연 도중에 심장 이상을 느껴 6곡을 연주하고 무대를 내려 간 것을 제외하고는 한 평생 잡힌 라이브 전부를 소화 해 낸 바 있다. 그 당시는 꽤나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고.

- 2013년 WOA 에서 있었던 갑작스런 심장 이상을 기점으로 Lemmy 는 그동안 줄기차게 해 온 술 담배 마약류의 방탕한 삶을 청산하게 된다. 오랜 시간동안 당뇨와 고혈압을 겪어 왔어도 끊지 않던 그가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헬쓱하게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들었지만 “의사 말 잘 듣고 그래도 와인 한두잔 정도는 괜찮대서 그건 마셔.” 라며 인터뷰에서 농을 던질 정도로 그는 여전히 강했다. 허나 담배는 절대 끊지 않더라.

- 하지만 Lemmy 는 2년뒤인 2015년 12월 28일에 70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조용히 그의 집에서 말이다. 70세 생일을 맞이 한 4일 뒤의 일이었고, 불혹의 나이에도 남다르게 건강하고 강인한 쾌락주의 삶을 살아 온 그였기에 그러한 부고 소식은 정말 거짓말 처럼 느껴졌다. Motörhead 는 2015년에 22번째 앨범 Bad Magic 을 발표 한 바 있는데다가, 신보 발매 투어까지 행한 상황이었고, Lemmy 는 예전같지 않아도 언제나 처럼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현역이었고, 최고였으며, 처음 모습 그대로 멋지고 위험하고 야비하며 친절하며 진실 된 남자로 살았다. Motörhead 결성 당시 슬로건인 Born To Lose, Live To Win (패배 하기 위해 태어 났으며, 승리하기 위해 산다.) 대로 살다 가셨던 것이다. 그가 바로 Lemmy 다. 그리고 락앤롤을 연주했다. RIP.

- Mike Villain